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7 법난 (문단 편집) == 전개 == >참으로 참담하였다. 이미 많은 [[스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옷을 늦게 갈아입는 스님에게 그들은 발길질과 쇠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퍽퍽 내려치는 소리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떤 스님은 벌써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어떤 스님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발길질과 쇠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내려치니 시멘트 바닥에 피와 울부짖음이 낭자했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거꾸로 세워 콧구멍에 수건을 씌우고, [[고춧가루]]를 퍼 넣고 거기다 양동이의 물을 들어부었다. 이름 하여 고춧가루 물고문. 다짜고짜 고문을 강행하면서 나에게 몇 차례나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까마득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앞에 다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버리면, 양동이 물을 냅다 끼얹는 바람에 정신이 들곤 했다. 정신이 드는가 싶으면 다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볼펜과 메모지를 밀쳐놓으면서 다그쳤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7106|불교닷컴에 게재됐던 수필 中]] [[1980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하나회|신군부]] 세력은 사회 각계의 반대 세력을 탄압해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는 신군부 세력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신 체제 당시 각종 [[종교]]계가 독재에 저항한 것을 경험한 신군부에선 예방 차원에서 불교계도 '손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불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개신교, 민족종교 등에서도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지만 가톨릭을 건드릴 경우 교황청 및 세계 가톨릭 교회를 적으로 돌릴 수 있고 개신교를 건드리면 동맹국이자 세계 최대 개신교 국가인 미국의 여론을 악화시킬 위험성이 높았으며 민족종교는 교세가 작아서 때려 봤자 효과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규모가 있으면서도 국제적인 커넥션이 미비했던 불교가 본보기로 선택되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불교는 해방 전 친일 행위와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 종권 다툼 및 이 과정에서 야기된 폭력과 유혈충돌, 승려들의 일탈 행위 등으로 인해 개독들의 숱한 막장짓에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진 2000년대 이후의 개신교 수준으로 이미지가 나빴다.] 반면 불교계에서는 1978년부터 일어난 [[조계사]]와 [[개운사]] 간의 종단 분규가 원만히 수습된 데 이어 1980년 4월부터 [[송월주|월주]]가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면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불교 자주화와 개혁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 [[신군부]]가 조종하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산하 합동수사단의 주도로 '사회정화'를 앞세워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를 비롯한 관련 인사 153명을 강제 연행했다. 또한 전국 각지의 [[절(불교)|사찰]] 및 암자에 경찰 및 군부대를 동원해 수색에 나서서 [[승려]] 및 관련 인사 1776명을 추가로 연행했다. 당시 연행자들에게는 각종 [[폭행]] 및 [[고문]]이 가해졌으며 삼보 등 일부 승려는 [[삼청교육대]]로 가거나 [[교도소]]에 수감된 채 순화교육을 받기도 했고 흥국선원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고문과 고생의 후유증으로 풀려난 후 사망한 승려들도 있었고 생존자 중에도 [[파킨슨병]]과 후유증으로 괴로운 날들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2021년 7월 22일 입적.]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계엄사 요원들에 의해 수모를 당한 끝에 총무원장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법난 당시 제주교구본사 [[관음사(제주)|관음사]] 주지였던 지선 역시 군 수사관들에 의해 새벽에 제주 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취조를 받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수사관들은 "두들겨 패서 [[승복]]을 벗기고 속복을 입혀 쫓아내겠다."거나 "바닷가에 빠뜨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여기는 죄를 만드는 곳"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죄를 불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월주가 끌려간 같은 시각에 혜성 역시 경찰 특수수사대에 의해 치안본부 무교동 분실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거기에 신군부는 신도회장 등 사찰 간부들까지 잡아들여 사건을 조작하려고 광분했지만 나올 게 없었다. 겨우 풀려난 지선은 사건 직후 계엄하에서 해체된 총무원 대신 만들어진 비상종단의 정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월간 말]] 1994년 5월호에서 안영배 기자가 쓴 <불교개혁 외길 지선스님의 사바세계 사랑법>이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울분을 안고 [[서울특별시|서울]]에 올라와 대면한 [[조계종]]의 현실은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나와 말 한마디로 [[승려]]들을 제적시키거나 치탈도첩시켰다. 참다못한 그는 "수십 년간 승려생활을 해 온 스님들을 어떻게 해명 한 마디 듣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옆에 앉아있던 스님이 "잔소리하지 말고 듣기나 하지"라며 말을 막고 나선 것이다. 그가 참을쏜가, "당신이야말로 정화대상인데 왜 여기 와 있냐"며 시비가 벌어졌고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 ><불교개혁 외길 지선스님의 사바세계 사랑법(안영배 글)>. [[월간 말]] 1994년 5월호. P. 168. 사건 당시 계엄사령부는 “불교계가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동·발호하는 [[비리]] 지대로서 자력으로는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신군부의 강요로 조계종 측에서는 '정화중흥회의'를 열어서 13명의 승려의 도첩을 박탈하는 처분을 내렸다. 11월 21일에는 [[http://m.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48814|'흥국선원']]이라는 순화교육장을 세워 ‘정화중흥회의’ 산하 사정기관인 정화분과위원회에서 징계를 받은 승려 중 24명에게 순화교육을 실시하기까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